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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6.25전쟁의 발생원인을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에 따라 찾아보고 왜 우리의 참혹한 참사인 6.25전쟁이 발생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참혹한 전쟁이자 재앙인 6.25전쟁은 기억하기도 싫지만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더 긍정적으로 볼 수 있기에... 시작하겠습니다!!

 

-1950625일에 발발하여 1953725일에 휴전협정으로 인해 현재 휴전중인 6.25전쟁은 한반도 역사의 낫지 않은 상처 중 하나입니다. 6.25전쟁의 물리적 원인은 북한의 기습남침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지만 이를 둘러싼 많은 원인이 존재하기에 그것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요!!!

 

 6.25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아요!!  

6.25 전쟁의 국제적 요인


6.25 전쟁의 국제적 요인은 첫 번째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 소의 대립이다. 당시 소련은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터키와 그리스에 공산당을 지원하고 동부유럽과 발칸반도의 위성국가들을 공산화 시키는 등 사회주의 세력을 팽창 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국 역시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트루먼 독트린 및 마셜플랜, NATO등을 결성하는 등 적극적인 대처를 한다. 따라서 세계는 미, 소의 이념간의 대립으로 인한 냉전체제, Cold war의 기류가 감돌게 되었고 한반도 역시 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두 번째 요인은 미국은 소극적인 대 한반도 정책이다. 당시 미국의 군사 전략은 유럽에 초점을 두고 있었으며 극동아시아에 대한 전략은 도서방위전략으로서 일본을 전략적 거점으로 생각하고 나머지 국가들에 대한 전략은 도서들이 제공하는 해, 공군 기지를 활용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 당시 한국의 전략적 중요도를 16개국중 15순위로 두었는데 이것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태도가 굉장히 적극적이었던 소련에 비해 미국은 훨씬 소극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애치슨 선언을 통해서 보다 확실해 지는데 이는 잠시 뒤 국내적 요인에서 좀 더 자세하게 기술하도록 하겠다. 세 번째 요인은 소련, 중공의 한반도에 대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것이다. 소련은 전술한 바와 같이 팽창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고 아시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미국이 일본을 통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견제가 필요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한반도는 굉장히 적합했던 것 이다. 중공의 경우 전통적 인식과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정부를 지원한 미국의 남한 지원으로 남한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국공내전이후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대만 통합을 위해서는 소련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러한 이유로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적화통일에 대해 중공역시 지지를 보내게 되고, 이에 북한까지 합세해 3국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6.25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6.25 전쟁의 국내적 요인


.국내적 요인의 첫 번째는 가장 중요한 남, 북한의 힘의 불균형이다.

치슨(1950.1.12.) 선언 이후 미국은 남한과 대만을 극동방위선에서 제외 시키는 등 한반도에 대해 소극적인 군사정책을 펼친다. 이는 북한과 소련이 전쟁을 결심하게끔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또한 미군은 애치슨 선언 이전 1949년에 군사고문단을 제외하고 주한미군을 완전 철수 시키는데 이는 남한의 군사력에 큰 공백을 가져오며 이 역시 전쟁의 원인이 된다. 이와 반대로 소련의 경우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미국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한반도를 적화시킬 야욕을 품고 중공과 결탁하여 북한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되어 힘의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토대로 당시의 남, 북한의 대칭 및 비대칭 전력의 차이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군은 약10만 북한군은 약 20만으로 규모에서 2배 가까이 되었으며 전차의 경우 북한은 242대를 보유한 반면에 남한은 한 대 조차 없었다. 야포 및 항공기 역시 8배를 넘는 숫자 차이를 보이며 심각한 힘의 불균형인 상태였던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한반도 내의 국내 정세 혼란 및 군 수뇌부의 모순된 조치이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19504월이후 3회에 걸쳐 경계태세가 발령되었었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최종해제 된 것이 1950624일 이었다. 또한 6.24에는 육군본부에서 장교구락부 개관파티가 벌어지고, 기 양성된 호국군 4만명을 해체 시키는 등 사실상 군 수뇌부가 적절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게다가 여,순 반란사건, 건제부대 월북사건, 위조화폐로 인한 물가폭등 및 혼란 등 국내 정세 역시 무척 혼란했다. 따라서 전쟁에 대비할 능력은커녕 제 스스로 살아가기도 어려웠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을 살펴 보았을 때 6.25 전쟁은 사실상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으로 볼 수도 있죠... 이러한 점들을 통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한 원인들을 잊지 말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한다는 것인것 같아요!! 또한 우리는 아직 전쟁이 끝난 종전상태가 아닌 휴전상태라는 것을 명심하고 생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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